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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신의 한 수에 관하여 - 알파고 그 이후
제시문 #1. 알파고 이후의 바둑계 (중략) 이미 프로 기사 간의 대국에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정석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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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펜시브(마취중진담)씨의 글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 중 하나임.
제시문 #1. 알파고 이후의 바둑계
(중략) 이미 프로 기사 간의 대국에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정석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알파고의 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함. 이해는 안 가는데 무조건 따라만 해도 원래 인간 정석보다 나은 것 같아서 무작정 따라 한다고 함. (후략)
생각 #1. 뿌요뿌요
2층 개구리 노호호 - 개구리 전법
뿌요뿌요에서는 같은 색 뿌요가 4개 모이면 사라지면서 상대방의 쌓기를 방해하는 돌덩이를 보낸다. 한번 일으킨 반응은 별것 없지만, 뿌요가 터진 자리에 윗자리의 뿌요가 내려와 배열이 변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키면 공격력이 크게 증가한다.
싱글 플레이에서 노호호라는 개구리 적은 이상한 전법을 썼다. 뿌요를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엄청난 속도로 오른쪽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러다 한 번 뿌요가 터지기 시작하면 몇 단계의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머리를 한참 굴려 고작 2~3단계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초보에게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초보들은 노호호처럼 세밀한 계산을 하지 못하지만 오른쪽에 쌓는 그의 전법을 무작정 따라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개구리 전법이다. 이것은 초보끼리는 반칙일 정도로 엄청난 효율을 보여준 전법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설픈 정석은 이 무지막지한 쏟아내기를 도저히 이겨내지 못했다.
사실 뿌요뿌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요를 쌓는 모양보다 뿌요가 쌓이는 속도였다. 뿌요를 빨리 쌓으면 상대방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무기를 공급받는 셈이었다. 가운데가 아닌 양옆의 뿌요는 끝까지 쌓여도 불리하지 않아서 오른쪽이나 왼쪽 구석에 쌓을 수밖에 없다.
뿌요뿌요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꿰뚫은 전법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초보들에게도 충분히 유용했다. 초보 수준의 머리 회전으로는 '기계적인' 개구리 전법을 다른 '인간적인' 정석으로 파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개구리 전법만을 쓰게 된 초보들은 그 이상의 '인간적인' 고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어린이 뿌요뿌요 대회는 개구리 전법을 조금 더 잘 쓰는 사람들만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조정 경기에서 1등의 전법은 2등의 전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기록의 차이가 아니라 순위만을 따지는 경기에서, 굳이 무리해서 거리를 벌리려다가 오판해서 역전당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격차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의 페이스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이길 확률이 높은 전법을 써서 진심으로 상대한 것이다. 자가 대국을
하며 신들의 전쟁을 보여준 알파고는 인간을 얕봐서 가끔 인간적인 수를 내준 것이 아니다.
생각 #2. 스타크래프트 본진폭탄드랍
스타크래프트에서 앞으로 전진한 적 병력을 우회해 중요한 건물들이 모인 본진에 대규모 폭탄드랍을 하는 것은 유명한 전법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을 처음 접해 건물을 맵 아무 데나 막 퍼뜨려 짓는 초보라면, 본진폭탄드랍의 효과를 따지기 전에 본진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해진다. 본진폭탄드랍은 나의 물리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수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전법이 된다. 상대방을 봐 줄 생각이 없어도 본진폭탄드랍을 할래야 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어서 인간을 위해 한 수 접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상대방이 인간인 한, 인공지능이 보여줄 수 있는 신의 한 수는 결코 등장하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을 보여줄 뿐이다. 본진에 건물을 모아지어 방어하는 프로게이머들이 폭탄드랍을 하는 모습을 보고, 초보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왜 (건물을 퍼뜨려 지은) 자신과 경기할 때는 이렇게 화력을 집중하지 않았느냐고.
생각 #3. 천재의 테셀레이션
- 천재가 만드는 육각형 벌집
완벽한 육각형을 띠고 있는 벌집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찬탄하는데 자주 인용된다. 한낱 미물인 줄 알았던 벌들이 최소한의 밀랍으로 가장 넓고 튼튼하며 아름답기까지한 구조물을 만들어낼 줄 알다니! 그러나 최근 밝혀진 바로는, 벌이 만든 원형의 집이 표면장력에 의해 육각형 구조로 저절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쌀알보다 작은 뇌를 가진 벌이 그런 재주를 부릴 리가 없지. 사람들은 놀라움을 거두며 허탈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지금의 벌에게 육각형을 생각해낼 지능은 없을지 모른다. 만약 벌이 사람만큼 똑똑했다면 수학을 통해 육각형이 가장 효율적인 구조물임을 깨닫고 제도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벌이 인간을 뛰어넘는 천재였다면 가장 최소한의 노력으로 원형의 벌집을 만들고 그대로 둘 것이다. 나머지는 자연의 힘에 맡기면 된다. 굳이 각도를 재가며 복잡한 짜맞춤을 할 필요가 없다.
영화 <아마데우스>
천재의 발상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해 냈는지 궁금해하지만 천재 본인에게는 원형 벌집과 같은 것이었을 터. 굳이 어설프게 틀린 계산으로 사각형의 집을 만들지 않고 그냥 직관적인 원형을 택했을 뿐인데 인류의 치밀한 계산을 앞질러가는 결과가 나온다. 벌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은 벌보다 수천만년은 늦게 이 사실을 알았다.
천재는 그렇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표면을 정복해 나간다. 진리의 평원이 무한히 펼쳐진 말안장 모양인지 유한한 폐곡면인지 알 방법은 없다. 어쩌면 진리가 유한하더라도 그 가장자리가 프랙탈 구조일지도 모른다. 어떤 천재가 어떤 방식으로도 완벽하게 덮을 수 없는 이 찝찝한 가장자리 보푸라기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부른다.
* 테셀레이션 : 한 가지 이상의 도형을 이용해 틈이나 포개짐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완전하게 덮는 것
* 프랙탈 해안선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4&contents_id=822
*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2&contents_id=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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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후에 곰곰히 이 글을 보고 천재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었다.
근데 난 이 글을 쓴 사람도 천재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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